2023년 3월 21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은혜로운 망상

 



적막한 사무실에서 모처럼 부담없이 네이버;;


윤은혜가 차기작 선정과 관련해 신중을 기하고 싶다고 밝힌 기사를 읽었는데 신중을 기하고 기해서 우리가 준비하는 영화에 출연해주면 좋겠다. 나는 윤은혜의 베이비복스 시절부터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윤은혜가 차기작으로 우리 회사가 준비하는 영화에 출연해준다면 우리 영화사는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한큐에 대한민국 정상의 영화사로 거듭날 수 있다. 윤은혜 출연 작품에 투자 제의가 이어질 것이고 윤은혜 출연 작품에 투자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투자 진행이 지지부진했던 작품 서너편 정도는 패키지로 얼렁뚱땅 투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다음 달을 내다보기도 힘든 지난 날일랑 잊어버리고 5년, 10년의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할 것이고 헐리웃에 사무실도 알아보자.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돌려야 할 것이므로 내친김에 건물의 다른 층도 빌리고 - 아예 사버리든가 - 옥상도 우리 회사 전용으로 해달라고 하자. 전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같은 것도 하면서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이렇게만 되면 회사에는 영화를 만들 능력이 있는 영화인들로 북적일 것이고 유명 배우들도 많이 오게 될터이니 분위기가 한층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변할 것이다.


믹스커피가 떨어질 일도 없을 것이고 간식 얘기가 나온 김에 아예 목표를 높게 잡아 구글 직원들처럼 먹여달라고 하자. 에스프레소 머신도 사달라고 해야지. 구글은 과일이나 베이글 도너츠 같은 것도 공짜로 그냥 준다고 하더라. 유리컵 설거지도 상당히 짜증나는데 당당하게 1회용 종이컵을 다시 사달라고 요구해야겠다. 구형 데스크탑도 노트북으로 교체해달라고 하고 A4용지도 물쓰듯 써보고 싶다. 이면지는 이제 버려도 되겠지?


직원들의 취미 활동도 지원해줄까? 우리 영화사 직원들도 대기업 직원들처럼 주말엔 동아리를 조직해서 회사의 지원금으로 레저활동을 하는거다. 해병대 캠프나 백두대간 종주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경영상 해고한 빌딩 청소부 아줌마도 다시 불러들이자. 몇일 청소를 해보니 귀찮고 짜증난다. 내가 해고한 건 아니지만 출근할 때마다 엘리베이터를 청소하는 아줌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분위기가 영 어색하고 썰렁해서 마음도 불편하다.


윤은혜가 우리에게 와 주기만 하면 우리 회사도 말로만 듣던 대기업처럼 직원들의 자기 계발에 신경써줄 수도 있다. 공병호 같은 사람들이 해주는 강의도 들어보고 싶고 삼성처럼 어디 연수원 같은데서 전직원이 피땀 흘려 매스 게임 연습도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건 완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라고 동요를 부르는 기분인데 노래를 다 불러도 박수가 없다는게 어릴 때와는 다를 뿐이다.


한때 베이비복스의 막내였던 윤은혜의 차기작 행보에 적어도 영화인 수백명이 긴장 중인데 그냥 드라마나 한편 더 할래요라면 낭패.


나는 잘못없다.

덧글

  •  acid 2007/10/16 11:40 # 답글

    (참고로 O영화사 B 피디는 에스프레소 머쉰을 협찬받아 왔습니다.)
  •  애드맨 2007/10/16 11:50 # 답글

    아.. 협찬.. 좋네요..
  •  달콤베이비 2007/10/16 15:29 # 답글

    참고로 z영화사에는 모 한류스타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선물로 갖고 왔습니다.
    그래봤자 대표방에 고이 모셔져 있어서 아무나 마시진 못합니다.
  •  RIRUKA 2007/10/16 17:40 # 삭제 답글

    저희는 주로 한류스타(남자) 위주 사업을 하는 소속사입니다만, 업종이 그래서인지 여자배우들한테는 관심도 없습니다.
    윤은혜 대단한건 아는데, 몸 파는 여자라느니 뭐 그런 식으로 까면서 무시하고 그럽니다.

    저희는 계약서 상에 이름만 '갑'이지 '을'이나 다를바 없는 편이라 그런지, 한류스타들 어쩌다 만나도 진상같은 꼴만 보지, 떡고물이 안 떨어지는군요
  •  애드맨 2007/10/16 19:26 # 답글

    달콤베이비님의 글을 읽고 편의점에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사왔습니다.
    RIRUKU님 // 을이 진상을 떨다니... 한류스타가 아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네요.ㅎㅎ
  •  이소 2007/10/16 19:47 # 답글

    갑자기 슬퍼지는 건 왜죠? ㅜ
  •  ArborDay 2007/10/16 20:46 # 답글

    거참 은혜스러운 상상이로군요.
  •  Lucida 2007/10/16 23:30 # 답글

    안쓰고 처박아둔 에스프레소 기계라도 빌려드리고 싶군요~
  •  魔刀露手 2007/10/17 20:15 # 삭제 답글

    이전것까지 모조리 정말 잘 봤습니다. 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네요. 화이팅 함 때리고 갑니다.
    참, 옥상 전용 사용은 소방법 위반이므로 현실성이 없습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제 블로그에도 놀러오세요. 개인적인 얘기는 없고....... 와 보시면 압니다.
  •  애드맨 2007/10/18 01:01 # 답글

    이소님 // 그러게요 왜 슬프세요?
    ArborDay님 // 은혜 만세요.
    Lucida님 // 버릴꺼면 연락주세요^^
    魔刀露手님 // 놀러갈께요. 소방법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홧병

 


이제 다 끝난 것 같아 억울해서 자다 깼다. 다시 잠을 청해봤지만 잠도 안 오고 가만히 누워있자니 억울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일째 이러는데 아무래도 불면증같다.


올해가 가기 전이나 내년 초쯤 영화사가 망하거나 내가 나가게 되리라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라 딱히 잠에서 깰 일이 아닌데 상업 영화 한번 해보겠다고 영화사란 곳에 들어와 꼬박 꼬박 성실하게 출퇴근하며 발버둥 난장판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한편을 제대로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또 한 해를 보낸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속이 쓰려온다. 요즘엔 식욕도 없다.


홧병 걸리겠다. 벌써 걸렸나?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인 내가 홧병에 걸릴 정도면 망해가는 영화사 대표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비록 직원들 월급도 제때 못 주고 회사는 망해가지만 어쨌든 이 불경기에 힘들게  회사를 세우고 일자리를 창출한 사람이다. 요즘엔 부동산이나 주식 안하구 직원 고용해서 사업하는 사람이 애국자라던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대표가 바로 그 애국자였다. 까만 연탄이 뜨겁게 열을 뿜어낸 후 하얀 재로 변하듯 요즘 대표의 머리에 흰머리가 점점 늘고 있다. 팍삭 늙은 거 같아 보기 안스러울 정도다. 노력하고는 있지만 대표 맘에 딱드는 부동산을 못찾아줘서 더욱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대표 걱정할 때는 아니다. 객관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때 한국 영화계가 다시 좋아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우스에서 로티플 기다리는 심정으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고 뭐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비관적이다 보니 나도 딱히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홧병에 걸린걸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영화사 직원으로서 할 일은 없고 개인적으로 시작한 시나리오는 안 써지고 속은 쓰리고 가슴은 답답하다. 게임을 하려다 영화를 보면 나아질까 싶어 스텝으로 참여할 뻔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보았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부가판권 시장이 붕괴되고 한국 영화 업계가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아는데 나도 이러는 내가 싫다.


하여간 내가 스텝으로 참여할 뻔한 했던 영화는 초반 10분 집중해서 보고 나니 왜 망했는지 알 것 같아 나머지는 초고속으로 후다닥 감상하고 하드에 여유공간이 별로 없어서 바로 삭제해버렸다. 시나리오 읽고 예고편을 보고나니 대충 영화는 안 봐도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 내 느낌이 맞았다.


이 영화가 우여곡절 끝에 크랭크인하고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스텝 제의를 거절했던 나의 선택을 후회했었지만 막상 완성된 영화를 보고 흥행 성적을 체크하고나니 그나마 회사 다니면서 월급이나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글을 쓰다보니 좀 나아졌다. 블로그 만세.

덧글

  •  NINA 2007/10/16 06:55 # 답글

    딱히 제가 해드릴 말은 없지만, 힘내세요.
  •  tommi 2007/10/16 08:58 # 답글

    만세!
  •  Lucida 2007/10/16 10:40 # 답글

    힘! 요즘 이상하게 '1박2일'의 복불복 게임을 보면서 인생사 참~ 하는 데 한국영화계 느낌이 왠지 그래요. 무식하게도...
  •  검은머리요다 2007/10/16 10:58 # 답글

    그래도 안쓰럽게 생각할 만한 대표님 하고 일한 게 그래도.. 괜찮은거 아닐까요. '이 회사 나가기만 하면 너를 갈아마시겠다' 하고 이갈리는 사장들도 많잖아요.. 별로 격려는 아니군요. 블로그만세.
  •  애드맨 2007/10/16 11:37 # 답글

    저는 정말 괜찮아요.
    NINA님, tommi님, Lucida님, 검은머리요다님의 따뜻한 배려와 격려에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눈독

 


회사에 비품이 다 떨어져간다.


자원절약 캠페인의 일환으로 A4용지 아껴쓰기 운동을 벌인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아껴쓰고 자시고 할 A4용지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커피는 떨어지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A4용지가 없는 사무실은 난감할 뿐이다. 예전엔 투자 검토 차원에서 들어온 시나리오를 모니터로 읽기 불편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A4용지로 출력해서 읽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되는 분위기다. 눈이 아프고 피곤해도 모니터로 읽는다.

친한 직원들에게는 농담처럼 계속 월급 안 나오면 회사 비품이라도 들고 나가야 되겠다고 했는데 다들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해주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눈독 1순위는 뭐니뭐니해도 컴퓨터다.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해 정이 들만큼 들었고 개인정보도 많이 저장되어 있어서 남의 물건 같지 않고 컴퓨터 말고는 제대로 값을 쳐줄만한 비품도 없기 때문이다. 나도 당장 회사에서 월급 대신 뭐 들고 나갈래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컴퓨터를 챙길 것이다.


2순위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이나 디비디들이다. 대부분 본 것들이라 별로 탐나지는 않지만 뭐라도 들고 나가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책상이나 의자를 들고 나갈수도 없기 때문에 책이나 디비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 순위는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컴퓨터나 책 그리고 디비디말고는 돈이 될 만한 것도 없다. 화분이나 영화 포스터 같은 건 짐만 될 뿐이다. 차라리 이면지를 들고 나가련다.


3순위로는 작가와의 인간 관계? 인간 관계는 알다가도 모를 성질의 것이지만 작가들과 소액의 채무 관계라면 확실히 있다. 계약금이 늦어져서 미안한 마음에 돈을 빌려줬다가 아직 못 받고 있다. 적은 돈은 아니고 많다면 많은 돈이라 받긴 받아야겠는데 먹고 죽을 돈도 없다길래 많이 난감하다. 반쯤은 포기했지만 하여간 작가와의 채무관계도 들고 나가긴 해야겠다.


직원들과 잡담을 마치고 인터넷으로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컴퓨터 기종의 가격 조회를 해보니 밀린 월급을 충당하려면 열대 정도는 들고 나가도 될까 말까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사무실 컴퓨터 열대를 다 들고 나갈 수도 없고 들고 나간다 해도 보관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다 팔려고 해도 절도죄로 걸릴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는다.


POSCO 직원은 회사 관두고 중국에다 철강 제조 기술 팔아서 10억 넘게 챙겼다가 국정원 직원에게 걸려 감옥갔다는데 망해가는 영화사에는 경쟁사에 팔아 넘길 원천 기술 같은 것도 없다. 빼돌릴 기술도 없지만 빼돌린다 해도 업종 전체가 불황이라 빼돌린 기술을 살만한 회사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빼돌릴만한 기술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내일도 영화사는 망해가겠지만 회사 앞에 위치한 밥집 매출은 끄덕없을 것이다.

오늘따라 회사 앞 밥집 사장님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덧글

  •  이방인 2007/10/14 18:32 # 답글

    꼭, 뭔가에 대한 마감시한이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힘내세요.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겠죠.
  •  애드맨 2007/10/14 19:05 # 답글

    수는 없습니다.ㅎ;;
  •  이적 2007/10/14 20:42 # 답글

    누구나 삶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거겠지요.
    상대의 짐을 덜어줄 순 없겠지만-그럼 내짐이 늘어나니-씩 웃으며 등을 밀어줄 순 있을 것 같습니다.
    힘내세요.
  •  애드맨 2007/10/14 22:35 # 답글

    이방인님, 이적님 감사합니다. 제가 꼭 전차남이 된 기분이에요..^^~
    이제 에르메스만 나타나면 ㅎㅎ;;
  •  그때그넘 2007/10/15 00:09 # 삭제 답글

    힘 내라고 해서 힘이 날 일도 아니고, 망하지 않았으면 한대서 망할 회사가 망하지 않을리도 없지만 아무쪼록 블로그 만이라도 꾸준히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마리 2007/10/15 10:06 # 삭제 답글

    힘 내세요...저도 망해가는 영화잡지사에서 300만원짜리 EOS 카메라를 들고 나오고 싶었지만 절도죄라고 하길래 관뒀습니다. 밀린 월급 생각하면 그것도 보충이 될까말까였는데..
  •  gungak 2007/10/15 20:50 # 삭제 답글

    밀린 월급이 회사 채무보다 변제 우선 순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사에 대해 밀린 월급 변제에 대한 증빙 같은 것을 준비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무엇이 필요한 지는 저도 확실히는 몰라서요)

    그 뒤에는 회사 비품을 채무자들에게 안뺏기도록 잘 감시해야 합니다. 진짜 아무것도 남지 않게될 수 있거든요....

    에궁.... 회사일이 잘 풀려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이런 글을 적다니.....
  •  애드맨 2007/10/15 23:34 # 답글

    다들 감사합니다...
  •  지나가는 2007/10/16 09:40 # 삭제 답글

    차라리 이면지를 들고 나가련다.




    ...........................

    --> 울 뻔했습니다. --;;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오프라인으로 표시

 




아직 회사를 관두지도 않았는데 메신저에 들어갈 때마다 오프라인 표시로 들어가게 된다.

메신저에 접속할 때마다 대화상대로 등록되어 있는 작가들에게 작품 진행 과정에 대한 문의가 오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잘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잘 되고 있다고 사기를 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속 편하게 오프라인으로 표시로 은밀하게 접속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심정은 아마 이럴 것이다. 한 두번 겪은 것도 아니고 안봐도 훤하다.


처음 계약을 할 땐 좋다. 설레인다. 드디어 꿈을 이룬 듯한 성취감이 들 것이다. 그날 이후 (보통 각색 계약까지 한다) 작품 진행 회의도 하고 술자리도 자주 갖는다. (이런 술자리에서 연분이 생기기도 한다는데 나는 안 겪어봐서 모르겠다.) 자신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 두근거린다. 영화사 사람들과 친해진 기분이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세상이 아름다워보인다. 회의 때마다 A4에 인쇄되서 나온 과학적으로 보이는 시나리오 모니터 결과 같은 걸 보면 왠지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가고 회의를 거듭해도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한 소리 또 하고 뜬구름 잡는 기분만 든다. 이제 설레임은 없다.


일주일에 두세번 가던 영화사를 한번만 가게 되고 다음 미팅은 일주일 뒤로 한달 뒤로 혹은 준비되면 연락할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술자리도 없다.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거니 생각하며 속편하게 집에 간다. 방에 들어와 예전에 써두었던 이런 저런 아이템들을 뒤적이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 만나서 술도 마시다보면 한달은 금방이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반가운 마음에 영화사에 가면 뭔가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일단 회의 참석 인원이 예전보다 적고 회의 진행 준비 상태가 미흡해 보이며 심지어는 지들끼리 진행해보고 연락준다더니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답이다.


예전엔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였는데 이제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맞은 편에 앉은 영화사 직원과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정말 잡다한 얘기를 하다가 할 얘기가 다 떨어지고 나면 작품 얘기를 시작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별 진행사항은 없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히 윗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해준다. 작가로서는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들을 얘기도 없다. 계약서에 명시된 돈이나 다 받았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의 설레임은 다 어디로 가고 권태기의 연인처럼 김빠진 분위기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다 그런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영화사 문을 나서면 어느 작가는 쓰자마자 스크린까지 직행이라는데 나는 왜 이러나 싶어 한숨이 나오지만 누구랑 술마시고 싶은 기분도 안 나고 해서 곧장 집으로 간다. 괜히 차를 끌고 온 경우엔 제법 나온 주차비에 피눈물이 난다. 집에 도착해 통장 잔고를 체크해보면 얼마 되지도 않던 계약금은 어디로 가 버린걸까? 잔고를 확인한 순간 고향에 온 듯한 궁핍한 절망감이 온 몸을 휘감아온다. 다시 원점이다.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메신저에 들어가서 분풀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예전에 대화상대로 등록해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을 찾아본다. 회사에서 못다한 얘기도 하고 싶고 진행사항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어 있다. 분명히 내가 차단하거나 삭제하진 않았는데 점점 메신저에서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예전에 심심할 때 메신저에서 만나면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잡담도 많이 나눴는데 요즘엔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혹시 나를 차단한걸까? 아니면 오프라인으로 표시하고 몰래 접속하는 걸까?


답은 후자다.

나는 오프라인 표시로 몰래 접속한다;;

덧글

  •  마리 2007/10/14 11:27 # 답글

    ....제가 전에 망해가는 출판사에 다녔을 때 저자들에게 했던 행동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째서 제가 다닌 회사들은 '망해가는 영화잡지사' 아니면 '망해가는 출판사'였는지..저는 한때 이 모든 '망해감'이 제가 타고난 '망할 팔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습니다.
  •  애드맨 2007/10/14 17:03 # 답글

    저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  ㅠ_ㅠ 2007/10/23 06:04 # 삭제 답글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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