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점점 줄어드는 메신저 친구

 


추석이 끝나서인지 회사에는 하루종일 대표 찾는 전화가 부쩍 많이 왔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전화가 많이 온 이유는 대표가 그 동안 돈 달라고 보채는 거래처 사람들에게 추석 후에 어떻게든 해결해드리겠다고 얘기해왔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추석 연휴 다음날이 됐지만 대표는 여전히 돈이 없는지 자기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없다고 말하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회사내 각 부서 책상마다 전화벨이 수없이 울려댔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대표님 안계십니다 뿐이다.


오늘은 드디어 전화로만 밀린 돈을 독촉 해대던 사람들 중 한명이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다. 나는 약속이 있어 회사 사람들과는 따로 점심을 먹고 좀 일찍 들어와 밀린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사장님 계신가? 라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왠 뚱뚱한 아저씨 한 명이 사무실 출입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영화사에서는 사장보다는 대표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누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빌딩 관리인 아저씨보다는 높은 월세담당 아저씨였다. 마침 점심 시간 직후라 사무실에는 나와 대표 밖에 없어서 내가 직접 외부 손님을 상대해야 됐는데 대표는 대표 방에 있었지만 대표는 없다고 적당히 둘러대야만 했다.


이 아저씨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건물 관리하는 아저씨라 사무실 앞에서 하루종일 지키고 서 있으면 언젠가는 대표와 뻔히 만나게 될텐데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던중 고맙게도 대표가 대표방에서 알아서 나와주었다. 대표가 월세 담당 아저씨를 만나러 나왔는 줄 알고 왠일인가 싶었는데 대표는 아저씨에게 살짝 목례만 하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대표는 굳은 얼굴로 월세 담당 아저씨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밀린 시나리오를 검토했지만 어째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연휴 동안 못했던 밀린 채팅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메신저에는 토탈 70명 가량의 친구가 등록되어 있는데 그 중 영화인 친구 수는 20명 정도 된다. 한참 잘 나갈 때(?)는 메신저에 로그인한 영화인 친구 수십명에게 차례로 인사 나누고 안부만 전해도 반나절이 갔는데 몇 달전부터 영화인 친구들이 하나 둘씩 메신저에서 사라져 버려 지금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내가 차단당하고 있는 건가 싶어 걱정도 했었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회사가 망했거나 회사를 관뒀거나 아님 짤렸기 때문에 로그인할 일이 별로 없을 뿐이라고 하는데 메신저에 접속한 영화인 친구 수도 영화계 불황과 호황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같으면 추석때 대박친 영화 얘기도 하고 누가 무슨 영화 하는데 언제 크랭크인 한다더라 누가 캐스팅됐다더라 누가 어느 파트에서 사람 구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 없느냐는 식의 업계 얘기가 활발히 오고갔을 텐데 오늘의 영화인 친구와의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친구가 다니는 영화사가 현재 입주해있는 빌딩의 사무실 월세를 감당못해서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 대표와 빌딩 월세 담당 아저씨의 심각한 얼굴을 보아하니 남의 회사 얘기가 아닐 것 같다.

덧글

  •  cygo 2007/09/28 02:25 # 답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망해가는 게임 회사에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월세 밀리는 거 참..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먹튀사고

 


얼마 전에 주선했던 소개팅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일이 잘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그냥 계속 모른 척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당사자인 소개녀에게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론스타 먹튀 사건과 비슷했다.


소개팅 당일. 얘기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좋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1차는 2차로 이어지고 2차는 3차로 이어지고 밤이 늦어 커피나 한잔 하려고 집에까지 따라갔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해피타임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 날 이후 명절 내내 해피타임이었다는 뉘앙스였다.


문제는 일이 성사된 후 남자의 태도인데 여자는 사귀는 것을 전제로 기꺼이 해피타임을 함께 했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나에게 더 시간을 줘라는 말만 반복하며 해피타임만 몇 일 더 연장하고 질질 끌면서 확답을 주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개팅 후 몇일 되지 않았으니 남자 말대로 시간을 좀 줘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피타임 이후 남자는 연락하지 않고 여자가 언제나 먼저 전화했다고 하니 이미 게임은 끝난 것 같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다.


굳이 전화해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예의상 전화를 해보니 왠일로 통화가 됐다. 아무리 남자끼리지만 그래도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싶어 간접적으로 이리 저리 빙빙 말을 돌리며 소개팅녀에 대한 느낌을 물어보니 착하고 귀엽긴 한데 자기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냥 좋은 친구로만 지내고 싶다고 했다. 결국 안 이뻐서 사귀기 싫다는 뜻이다. 아마 소개녀도 눈치는 챘지만 확인사살을 바랬겠지.


다 큰 성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고 나는 주선만 했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주선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껴 소개녀에게 전화로 소개남은 당신에게 마음이 없다며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잠시 후 소개녀는 남자가 영 시원찮아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며 언제 술이나 한잔 사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서울은 정글.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동네다.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고 냉정한 상황 파악이 필요하고 착각은 절대 금물이다.


지금 소개녀의 심리 상태가 무료로 각색안 보내고 몇일 후 퇴짜 통보 받은 무명 작가의 심정과 비슷할까? 입사원서내고 면접에서 온갖 재롱 다 부리고 불합격 통보 받은 입사 지원자의 심정과 비슷할까? 망해가는 영화사 대표가 자기를 자신의 상사보다 더 신뢰하고 인정하는 줄 알고 충성을 다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직속 상사의 심정과 비슷할까?


아무래도 나는 소개팅 주선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소개녀에게만 이번 추석 소개팅까지 포함해서 4번의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매번 불발이었고 결국은 어디가서 누구에게 말도 못할 불명예스러운 먹튀 사고까지 터졌다.


영화를 하다 보면 누구를 소개하고 소개받는 일이 대부분인데 이번 먹튀 사고를 계기로 나의 사람보는 안목없음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소개팅 뿐만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더욱 신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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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콤베이비 2007/09/27 03:39 # 삭제 답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큰 여직원을 제 머릿속에선 소녀시대 윤아로 설정하고 읽고 있었는데 지금의 전개에 너무나도 당황스럽습니다.
    소개팅남 ㅆㅂㄻ
  •  커억. 2007/09/27 08:30 # 삭제 답글

    대책없는 심각한 먹튀로군요-_-

    ... 영화관련 업계에. 그런 먹튀가 좀 많은 편인가요? 주변에서도 영화 하신다는 (실제로 설마 하진 않겠지만.).. 그런 사기꾼들이 좀 많아서 말이죠...

    하긴 어디라고 먹튀가 없겠습니까만은...

    어케 제가 아는 영화 한다는 분들중에서 이미지가 떠오르는거 같기도 하고.참..
  •  Labyrins 2007/09/27 09:31 # 답글

    무도회장에서의 즉석 만남이 아닌 지인을 통한 소개팅에서는 행하기 쉽지 않은 행동이군요..-_-;
    너무 빠르게 해피타임을 가진 것이 문제이지만, 남자가 전형적인 XXX 스타일이네요..
  •  애드맨 2007/09/27 12:26 # 답글

    달콤베이비님//객관적인 외모 묘사는 아니었어요. 죄송요;
    labyrins님//남녀관계는 어찌될지 모르니 해피엔딩이 될 수도;;
    커억님//어디라고 먹튀가 없겠습니까만은...이 글의 주제입니다.

    사실은 저도 지은 죄가 많아서...
  •  이방인 2007/09/27 12:42 # 답글

    해피타임... 여자가 너무 불쌍해진다...ㅠ.ㅜ
  •  mrkwang 2007/09/27 14:26 # 답글

    -_-;
  •  검은머리요다 2007/09/29 16:55 # 답글

    맘에 안들면 건들지나 말것이지.이런 강아지새끼 같은.
    그나 저나 애드맨님도 맘 많이 상하셨겠는 걸요.......
  •   2007/10/18 03:14 # 삭제 답글

    내용은 슬픈데.. 글을 재밌게 쓰셔서 웃음이나네요 ㅎㅎ 글 재밌어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변명

 


질풍노도의 추석이 지나가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어쩐지 우울해질 것 같다. 2007년에게 변명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추석 지나고 연말이 된다고 그동안 꼬여있던 작품들이 잘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고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고는 싶지만 대충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유형별로 겪어봤기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모두에게 OK를 받아낼 수 있을만한 A급 베스트셀러 수준의 원작 아이템을 발굴해서 출판사에 전화해보면 대부분은 이미 판권이 팔렸거나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을 제시한다. 큰 맘 먹고 달러빚을 내서라도 판권을 사겠다고 덤벼들어도 이미 여기 저기서 연락을 받고 몸값이 뛴 HOT한 작가들은 돈을 좀 덜 받더라도 공신력(?) 있는 영화사나 유명 감독과 일하고 싶어하지 어지간해서는 듣보잡 신생 영화사에는 판권을 넘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플랜B. 모두에게 OK를 받아낼 수는 없겠지만 나름 싹수가 보이는 원작 아이템일 경우 수없이 많은 기획회의를 거치며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다보면 어쩌다 한번 쯤은 판권을 구매할 수가 있다.


판권을 구매했으니 이제 작품을 각색해줄 시나리오 작가를 구해야 되는데 작가 구하는 작업이 쉽지가 않다. 이 단계도 판권 구매 작업과 똑같은 어려움이 있는데 모두에게 OK를 받을 만한 A급 작가인 경우는 몸값이 비싸고 스케줄도 꽉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주변 영화인들에게 물어물어 B(?)급 혹은 신인 작가와 컨택을 하고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신생 영화사와 무명 작가의 관계이다 보니 서로에게 신뢰가 없어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각색안이나 각색에 대한 아이디어를 간단하게 써오는 작업도 돈을 받고 해야 되는데 영화사 입장에선 신인 작가가 뭘 써올 줄 알고 돈을 줘야되냐는 생각이 들고 작가 입장에선 일단 한번 써 갔다가 뻰찌 먹으면 뭐주고 뺨맞은 꼴이 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르고 잔뼈가 굵은 작가들은 대충 사무실 구경 한번만 해도 회사 자금 사정을 알아내는데 제법 여유가 있는 회사라고 견적이 나오면 아쉬운 건 작가 쪽이라 영화사에서 굳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각색안을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런 무료 각색안이 분쟁의 씨앗이 되곤 한다.


실제로 신생 영화사와 신인 작가 사이에서는 이런 분쟁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분쟁은 신인 작가가 영화사에서 진행하는 작품의 각색 작업을 따내기 위해 일단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작업한 무료 각색안을 보내면서 발생한다. 각색 작업이 쉬운 작업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신인 작가는 각색안을 보내고 몇일 혹은 몇주일 후 영화사 기획실 직원에게 작가님의 각색안은 우리 회사의 기획 방향과는 다르기 때문에 죄송하게 됐습니다라는 통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통보를 받게 되면 대부분은 그냥 소주 한잔 하며 신세한탄하고 내일을 기약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주변 영화인들에게 그 영화사 욕을 해댐과 동시에 법정에서 보자며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하고 자신의 각색안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각서를 써달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소정의 사례금을 지불하는 선에서 마무리 된다. 기가 쎈 영화사에서는 그냥 무시해버리기도 하는데 그래도 일이 커졌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영화사 쪽에서 작가를 믿고 계약을 하고 진행비를 지불 했는데 마감일을 한참 넘긴 후 형편없는 수준의 각색안 한 장만 달랑 이메일로 보내오는 경우다. 대표에게 내가 써도 이거보단 낫겠다는 호통을 들은 기획팀 직원은 허둥지둥 재작업을 요구하지만 몇일 후 다시 오는 건 역시 형편없는 수준의 A4 한 장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런 오고감이 몇 번 반복되면 작가와 영화사의 인연은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그 작가에게 일을 시킨 기획팀 직원은 영화사에 누를 끼쳤다는 생각에 월급이나 진행비가 나오지 않아도 떳떳하게 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된다.


감독 선정 단계의 어려움에 대한 변명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든지 말든지 해야겠다.


그나마 아이템 발굴 작업이나 작가 선정 작업은 영화사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얘기고 사무실 월세나 제대로 내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의 영화사 기획팀에서는 사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작품 개발에 참고한다는 명목으로 집에서 가져온 외장하드에 저장된 일드나 미드 그리고 영화를 보며 업무 시간을 떼우며 회사 사정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건 플랜C. 기획팀 직원이 직접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다. 베스트셀러급 원작을 구매하거나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와 계약할 여력은 없으니 어차피 월급 받고 할일도 없는데 출근해서 시나리오를 못 쓸 이유도 없다. 회사 입장에선 시나리오가 잘 나오면 땡큐고 안 나온다고 해도 본전이다. 기획팀 직원의 입장에선 직접 쓴 시나리오를 회사에서 좋다고 하면 땡큐고 회사에서 싫다고 하면 다른 회사에 들고가면 되는데 다른 회사에서 싫다고 해도 그냥 습작했다 생각하면 된다. 이래저래 회사나 직원에게 손해는 아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통계에 의하면 플랜C가 가동된 후 영화사가 망하기까지는 대충 6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얼마전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덧글

  •  Kitano 2007/09/26 01:12 # 답글

    애드맨님의 블로그를 올 때마다..
    웃음이 나면서도..가끔 졸업 후 제 진로를 생각하면 웃음이 싸악 사라집니다;;;; ㅡㅜ..
  •  애드맨 2007/09/26 01:16 # 답글

    kitano님 // 실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웃어넘겨주세요 ㅎㅎ
  •  이적 2007/09/26 03:28 # 답글

    대박나길 기원합니다.
  •  hella 2007/09/26 03:29 # 답글

    이런.. 소리 나오는데요. 마지막 문장.;
  •  tommi 2007/09/26 05:30 # 답글

    갈수록 실화인지 아닌지가 정말 궁금해 지는군요...;;
  •  검은머리요다 2007/09/26 13:17 # 답글

    아이구 어쪈대요..
  •  아카식 2007/09/26 14:23 # 답글

    밸리타고 왔습니다.

    과연 이런 뒷얘기를 들으니 참 침통하군요.

    저도 관련 직종희망자로써 참 울적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네요.


    링크걸고갑니다.
  •  Azreal 2007/09/26 16:12 # 답글

    아 막 눈물이 나려고 해요;;;
  •  애드맨 2007/09/27 01:31 # 답글

    웃자고 쓴 글인데 분위기 완전 다운이네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므흣한 소개팅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귀성을 거부하고 서울에 홀로 남아있는 혼기 꽉찬 영화인 동갑내기 두 명에게 소개팅을 시켜주었다.


소개팅을 주선한지가 오래되서 몰랐는데 요즘 소개팅은 그냥 남자에게 여자 전화번호만 알려주면 당사자 둘이 알아서 하는 시스템이라 주선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하여간 여자에게 허락을 받고 남자에게 여자 전화번호를 알려주니 역시 알아서 잘 진행되었다. 그렇게 둘이서 만날 약속을 잡고 지들끼리 알아서 다 하는 모습을 보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싶었다. 그래서 둘은 만났다. 그냥 만난 것도 아니고 귀성객들이 빠져나가 한적한 서울 시내에서 아담과 이브처럼 오붓하게 사이좋게 잘 만난 것 같았다.


남자가 소개팅 도중에 소개시켜 주어서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문자를 받자마자 여자에게 문자로 속마음을 떠보니 ‘고마워. 담에 내가 술한잔 살께’라는 문자가 온 걸로 봐선 여자도 제법 만족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선행을 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둘이 만나서 어떻게 됐는지 너무 궁금해죽겠는데 밤 12시가 되도 새벽 1시가 되도 새벽 2시가 되도 새벽 3시가 되도 다음날 아침이 되도 뭐가 어떻게 됐다는 전화가 오질 않는 것이다.


남자는 고향이 지방이라 시내에서 혼자 원룸에서 살고 있고 여자도 고향이 지방이라 혼자 원룸에서 사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원룸은 걸어서 30분 거리다. 여자가 혼자 살기 때문에 소개팅이 끝나면 끝났다고 연락을 해줘야 안심하고 잘 수 있을텐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잤다. 두 남녀의 집이 가까우니까 남자가 잘 알아서 데려다줬겠거니 생각하고 신경 끄고 자려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이 가깝다보니 더 신경이 쓰이고 싱숭생숭한게 잠이 오질 않았다.


남자는 영화판에 뛰어든지 제법 오래되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고 여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늘씬한데 역시 영화판에 남자와 비슷한 시기에 뛰어들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잠깐 들은 얘기로는 서로 영화만 같이 안 했다 뿐이지 아는 영화인 대부분이 한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금방 친해졌을테고 마음씨 좋은 선남선녀라 흉한 꼴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다.


소개팅 후 24시간이 지났고 내일은 휴일이고 내일모레는 추석인데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두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고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결국 이렇게 나만의 비밀 블로그에다 털어놓게 되었다. 블로그에다 털어놓는다고 두 사람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소개팅 주선자인 나에게 연락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내 문자와 전화를 지금 이시간까지 씹고 있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잤으면 잤다고 허심탄회하게 연락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부디 서로에게 낭만적인 연휴가 되고 있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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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잇굿? Since 2007 :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추운 겨울 2020-06-02 15:07:17 #

    ... 에게 사과의 의미로 술을 사며 이번 겨울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만들어줄 남자를 반드시 소개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보너스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과 지난 번처럼 남자에게 너무 빨리 해피타임을 허락하면 안되는 이유를 차근 차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던 중 겨울이 되면 당장 내가 추위에 떨게 생겼는데 지금 상처받은 소개녀 위로해주고 있을 땐가 싶어 ... more

덧글

  •  Kitano 2007/09/24 02:14 # 답글

    왠지 흉한 꼴이 아니라..흐으으음..
    마지막 줄의 의견에 저도 1표를;;
  •  검은머리요다 2007/09/24 12:11 # 답글

    아이참. 말안해도 서로 통하는 그 무엇.
  •  이방인 2007/09/24 12:30 # 답글

    부럽;;
  •  달콤베이비 2007/09/24 17:02 # 삭제 답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늘씬한 여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영화인의 원룸에 순순히 따라갈리 없습니다.
    30평대 아파트에 자취하는 솔로남이면 모를까...
    아님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키도 늘씬할 뿐 아니라 정말정말 착한 여자던지....
    아님 영화인에게만 흥분하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남자가 뻘짓하다가 끝났을 겁니다. 넘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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